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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김영아 - 이유를 묻지 않는 관대함으로

시를 음미하면서 많이 놀랐다. 시인의 정서가 나와 많이 닮았었고 비슷했기 때문이다. 모든 시가 하나같이 공감이 되었다. 결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되니 공감이 쉬울 뿐만 아니라 울림도 크게 느껴졌다. 덕분에 이 책을 쓴 시인, 김영아 시인에 관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의 작품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 너무 좋은 시가 많았다. 모든 시가 주옥같았다. 그중에서도 큰 빛을 안겨준 시가 있었다. 바로 「산이 늙는다」, 읽으면서 다가오는 감정이 벅찰 정도로 컸다. 개인적으로 이 시가 너무 좋았다. 훗날 삶보다 죽음이 가까운 나이가 되었을 때 이 시를 접했더라면 뭉클했을 것 같다. 꼭 외워야 할 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외에도 함께 가고픈 시가 많았다. 관대함을 지니고 여유롭게 세상을 대하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잘 느껴졌다. 

 

 

낮이 없다

 

빛은 가득했고 북적였다

계절을 구분할 수 없는 사람들 속에서

미끈거리는 바다 짠내가 

담배 연기와 함께 훈연되고 있었다

젖은 사람들 함성소리가 하늘을 가리는 밤

더 이상 술과 담배는 위안의 상품이 아니다

낮을 저당 잡힌 사람들의 외침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천둥번개가 되고 비를 뿌렸다

밤은 엷어져 색은 바랬고

배려를 잊은 변심한 영혼들의 행렬은

경계의 끝과 끝을 떠돌 뿐

선을 넘는 이 아무도 없었다

 

 

새해

 

바람이 세월에 취해

비척거리며 넘어갔지

질기게도 붙어 휘날리는 새벽

 

아직도 잊지 못한 내 마음은

바람이 부는 데로

세월 가는 곳으로

꼬리 물 듯 이리저리 나부끼던 

저편 언저리 강기슭

 

새해는 밝았고

벗은 맨몸은 아직도 제 옷을 찾지 못해

또 한철 부끄러움으로 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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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늙는다

 

굽은 등을 보이고 말았다

깡마른 몸뚱에 버짐이 서걱거리고

오줌 지린 아래쪽은 축축했다

한때 구름길 따라 솟아오르던 청춘의 숲은

태양을 가리고 내 안의 우주를 담아

산과 나무에 그리고 물에 각인시켜

영원을 꿈꾸었다.

부러울 것 없는 풍요로움과 관대함으로

모두를 포옹하던 그 시절

시간 앞에 맹세한 약속들은 놀림감이 되어서도

계절을 예고하는 신사였다

그의 옷과 신발과 재산을 빼앗고

깊은 우물로 밀어버린 죗값의 대가는

늙음이었으니

산이 늙어간다.

길 끝에 굽은 등으로 기어가는

늙은 산은 시간 앞에 언약했던가

빛을 잃은 산 아래 사람들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

계절의 신사는 다시 오지 않았다.

 

 

변화

 

변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분노, 자괴감, 울분, 열등감, 질투, 욕망

심장을 달구는 모멸감에 대해 덤덤하다면

인간으로서 예의를 저버린 것이다

한결같음을 의심하고 아름다움을 슬퍼하라

어제와 다른 오늘이 가로수 은행열매처럼

짓밟혀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 해도

적나라한 감정의 파편들은

한걸음 흔적으로 남아 전달자 되리니

 

 

석류

 

지독한 궁핍과 고독을 견디다

심장이 터져버린 석류

 

사방으로 흩어져 피 얼룩이 진다

동정 없는 무관심 속에 짓뭉개진 석류

 

홍옥처럼 빛나던 과거의 영광은

그대 기억 속에서만 충만하다

 

사랑은 낭비였고 

우정은 소모였다

 

다음 생이 있거든 부디 

그대, 석류는 잊고 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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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어쩔 수 없는 것을 쥐고 울지 않기를

남루한 일상은 안녕이다

앞으로 쏟아져 나올 고통의 계단에서

절대 뒤돌아 내려가지 않기를

 

그대의 절박함을 아는 이 없다 해도

이제껏 흘린 눈물엔 관심 없다 해도

언제부턴가 처절한 외로움을 외면한다 해도

 

발끝에서부터 기어오르는 후유증은 

온전히 그대가 받아들여야 할 중력의 일부

그대의 완치 없는 견딤을 응원한다

부디

굽은 어깨를 펴고 정상에 올라서라

 

 

나무

 

오롯이 비를 맞는다

우산 하나 내어줄 사람 없고

안타까워해 줄 사람도 없다

 

괜찮다 정말 괜찮다

비를 피하려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도움을 청하지도 않을 것이다

 

비가 그치고

강렬한 태양에 감전되듯 아침이 오면

한 발자국 넓어진 그늘을 자축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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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정말로 간절하다면

몸을 던져 빠져 볼 일이다

 

완전히 나를 버렸을 때

비로소 보이는 가느다란 선율

 

능소화 가지처럼

한 소절씩 피어나는 꿈

 

소망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우리에겐

 

우리에겐 가끔 조용해야 할 순간들이 있다

 

꽃들의 연이은 자살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며

깊은 밤 잠 못 드는 이유를 묻지 말아야 한다

 

허전한 미래에 목소리를 높일 필요는 없다

 

만남과 헤어짐에 이해를 바라지 말고

늙은 여인의 조잡한 화장을 비웃지 말자

 

우리는 가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 한 줄 감상평

 

  우리는 만사에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